A Clue to the Recovery of Authenticity : Bussot, Raul

진정성 회복의 단초 : 부쏘 라울

Installation, Performance, Film, Picture, Text

김홍록

Hong-rok Kim

1st solo exhibition

2013. 3. 25 ~ 31

khalifa gallery

Dailyserving

Michael Holmes

라울 부쏘(jr)(25)는 자세히는 기억 못하지만, 다섯 살 때 그의 가족은 쿠바를 탈출하기로 결심을 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 두 친구가 어둠으로 덥힌 망그로브 숲에서 뗏목을 조립했다. 그는 그들이 쿠바 연안경비대를 계속 살피며 해안으로 뗏목을 밀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바다에서 따뜻하기 위해 몸을 기대며 모였다고 기억한다. 또한 그는 쿠바와 달리 미국에서는 전력차단 없이 마음껏 텔레비전 만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속해서 마구 쏟아지는 폭풍우와 강한 바람을 만났다. 그들은 위치도 모르고, 생사도 모른채 며칠 동안 표류를 했었다. 5일째, 건강을 보충할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을 때, 그들은 먼 곳에 불빛을 보았고, 결국엔 미국 해안 경비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20년 지난 지금, 아티스트 김홍록은 라울을 만나 청담동 Khalifa Gallery에서 5일 동안 ‘진정성의 회복의 단초 : 부쏘 라울’ 이라는 전시를 통해 재발견을 시도하였다.

아티스트 김홍록은, 쿠바에서 라울의 아버지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금속 뗏목으로 갤러리 안에 설치하였다. 그들은 그 후 ‘돛을 올린’ 5일의 전체 기간 동안 지내고, 자고 오직 라울 부쏘 가족이 여행하면서 가지고 있던 같은 식량 (스팸, 초콜릿, 물)로 먹고 마시며 지냈다.  이 작업은 표면적으로 인내력에 관한 먹지 못하는 다음의 두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Tehching Hsieh’s Cage Piece (1978-79) 또는 Chris Burden’s White Light/White Heat (1974). 그러나 이 작업의 중요한 점은 위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티스트 김홍록은 현재작업을 통해 20년 전의 경험을 관객과 아주 적극적인 공유를 한다. 이 방법으로, 관객과의 상호작용은 퍼포먼스 그 자체의 많은 부분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의 시간과 장소는 역시 의미심장한 것이다. 지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한국과 북한의 관계와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 때문에, 한국은 자유를 위해 비슷하게 끔찍한 여행을 하는 북한 난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자주 투쟁한다. 같은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은 자주 고립됨을 느끼고, 나라의 최하위 계급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 전시의 부쏘 가족의 이야기는 쿠바 난민 이야기 중 하나이지만, 관계미학을 통해, 보편적인 난민의 경험이 된다.

(www.dailyserving.com)

Intro Movie

국으로의 여정

글쓴이 : 부쏘, 라울 (50) (Raul Bussot)

우리 중 아무도 그 여정을 하루하루 완벽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기억의 최선입니다.

우리가 출발하는 그날 밤, 우리는 뗏목을 바다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난 해안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노를 저었습니다. 쿠바 해안경비대가 걸어서 해안을 순찰했기 때문에 우리는 엔진의 소음으로 인해 잡히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습니다.

해안이 우리 뒤로 사라지고 엔진에 시동을 걸었기에 안전했습니다. 연료 탱크가 바닥이 나기 전까지 몇 시간동안 엔진의 힘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일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연료의 양에 대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떠나기 전, 테스트를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할만한 추정치가 있었지만 그 추정치가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그 연료는 다음날 자정에 완전히 소모 되었습니다.

그날 바다는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미량의 바람조차 없는 상황에 우리는 돛을 이용해 보려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연료 없이 모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엔진의 무게가 우리에게 단지 더 무거운 짐일 뿐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는 엔진을 바다로 던져버렸고, 계속 힘을 모아 노를 저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오후, 우리는 그 소리가 키웨스트 공항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목적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조 될 거란 희망이 우리에게 몇 시간동안 노를 저을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날 밤 25~30노트의 맹렬히 부는 바람과 함께 무서운 폭풍우가 일었습니다,

구름막이 밤하늘을 덮었을 때, 파도는 우리위로 4~5M 정도 일어났습니다.

우리아래에 어두운 물의 벼랑이 생길정도로 뗏목이 올라갔습니다. 엄청나게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다시 마주친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파도에 부딪치며 찰싹거리는 소리는 뗏목을 산산조각 내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퍼붓는 비는 내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차가운 비였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우의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몸은 심하게 떨렸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살벌한 추위로부터 보호해줄 옷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에 열기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옹기종기 붙였습니다. 뗏목위에 누워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 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폭풍우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것 뿐 이었습니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추위의 시간들을 출발하기 전 얻어놓은 코냑 한 병으로 견뎠습니다.

우리는 몸서리치게 떨리는 몸을 다소 진정 시키기 위해 그것을 다 마셨습니다.

프랜시스와 조지는 가방을 서로서로 기대놓았고, 개를 그 가방 옆에 앉혔습니다.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로사와 나는 각각 한 아이씩 맡아 꽉 안아 서로의 몸에 기대고 뗏목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돛은 바람과 비를 막는 마지막 방어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았고 그 항해는 아침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폭풍우의 결과, 반면 비행기의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경로에서 멀어져나갔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른 채로…

다음날 아침은 회색빛 구름 낀 날이었습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바람이 힘껏 불어 올랐고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몰랐기에 노를 젓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항해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이 알렉스에게 배 멀미약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냥 입속에 집어넣어준 것입니다. 그 약은 효과가 사그라지면 바로 아이를 창백하고 축 늘어지게 만들면서 구역질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해서 대신에 우리는 주사로 치료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 충분한 알약과 주사를 챙겨온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했습니다. 우리는 귀 뒤에 붙여 쓰는 패치로 된 약도 가져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 멀미를 겪지 않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 그 패치의 투입량이 아이에게는 맞지 않았었고 그런 상황 때문에 알렉스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아이는 그 시간동안 최악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운 좋게도 그는 단지 4살 박이였고 그때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라울에게는 뱃멀미를 하는지 자주 물어보았지만 한 번도 배 멀미 때문에 불평하지 않았었습니다.

셋째 날, 늦은 오후에 우리는 수평선에 있는 배 한척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 배는 더 이상 우리의 외침을 듣기엔 너무 멀리 멀어져갔습니다. 셋째날 밤 우리는 신념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은 너무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패배감이 들어서 돌아갈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미국보다 쿠바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갈 것을 상의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정전이 없는 그 곳으로,

그들이 원하던 장난감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그 곳으로, 그들이 만화를 시청할 수 있고 그들의 꿈이 현실로 될 수 있는 그 곳으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용감하게 행동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나에게는 목숨을 거는 미국을 향한 위험한 항해를 시도하게 된 주된 이유였습니다. 바로 그들이 쿠바로 되돌아가는 것에 맞서게 된 결심의 이유였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쿠바 같은 나라에서는 이룰 수 없는 미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순간에 돌아가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항해 동안 너무 많이 와버렸고 게다가 사실상 쿠바해안에 가까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쿠바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그것은 그저 확신일 뿐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우리의 인생동안 충실하게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쿠바인과 가톨릭 종교에서 중요한 인물인 성 나사로에게 약속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생이 더 남았다면, 우리의 남은 생 동안에 매년 12월 17일 그의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아직도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별한 것 없이 셋째 날이 지나고, 상어가 종종 뗏목 옆으로 출현했습니다. 한순간 나는 뗏목 옆으로 붙어있는 자전거 바퀴를 떼어버릴 것을 고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어의 출현이 할 수 있는 바람조차 앗아갔습니다. 뗏목의 진행에 바퀴들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노 젓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퀴를 달고 움직이는 것이 더 힘들었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이후 우리는 매우 가까운 배 한척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 면 그 배는 100미터 이내에 있었습니다. 당시 그 배가 발견되었을 때 나는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그 배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전등을 찾았습니다. 소리는 거리의 영향을 받지 만 빛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이 뭔가를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가 멈췄고 거대한 반사장치처럼 보이는 불을 켜고 무엇인가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 우리는 우리가 이제 구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분후에 그 불빛은 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습니다. 행운이 우리를 떠나고 희망은 거의 꺼져갔습니다. 나는 우리 안에 참담한 심정이 가라앉도록 기도했습니다.

넷째 날이 셋째 날과 같은 느낌으로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과 성 나사로, 성 바바라에게 우리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날 이른 시간, 하늘이 깨끗하게 걷히고 우리 머리위에 있는 북극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출발한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많이 와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해안은 우리 위치로부터 서쪽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안에 우리는 수평선 위에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을 볼 수 가 있었습니다. 불빛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해안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를 북쪽으로 밀어내는 만의 강한 해류를 가로질러 노를 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견뎌내고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구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아무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해류를 우리가 직접 만든 페달을 구르면서 이겨내고 정확히 서쪽으로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우리 앞에 육지가 있다는 확실함이 말로 할 수 없는 안도감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육지가 결국 나타났고, 우리는 몇 시간동안 노를 저었습니다. 정오쯤 우리는 한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내 다가온 보트의 이름은 창문위쪽 가로대 위에 쓰여 진 대로 “추구”였습니다. 그들은 해안경비대 이었습니다.

보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의 개는 확실한 이유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개에게 돌아오도록 소리쳤지만 녀석은 보트 쪽으로 쭉 나아갔습니다. 당시 저는 어떠한 힘이 개가 물속으로 뛰어들게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던 항해로부터 뗏목위의 제한된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여정에서 개는 뗏목의 요동을 견디기 위해 곧게 일어서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개의 극심한 피로를 알게 된 이후, 우리는 그 개를 강제로 눕혔습니다. 내 생각에 그 시간동안 우리 개는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개는 항상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매우 숭고한 뜻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롬멜 입니다.

Movie

filmed by U.S.A Coast Guard / Palm Beach, Key West, USA / 00:06:50 / 1993